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해군 ==== 해군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손원일]] 제독이 이끄는 해방병단은 미 군정에게 승인받은 유일한 한국계 군사조직이었으며[* 나머지는 미 군정에 의해 모두 해산되었다.] 나중에는 미 군정의 법령 86호에 의거, [[조선해안경비대]]를 승격됐다. 이후 진해에 해군기지를 창설하고 부산과 여수에 특무정대를 창설한 뒤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장교 교육을 늘리기 위해서 특별교육대를 설치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해군으로 명칭을 바꾸고 정식으로 해군으로 발족했다. 한국 해군 전력은 23척의 소해정과 경비정 1척, 유류수송선 1척, 상륙정 2척과 전차상륙함 1척, 그리고 전투함인 구잠함 4척이 있었다. 소해정은 미국의 YMS 소해정과 일본제 [[JMS]] 소해정으로 남한에 주둔한 미 군정이 넘겨준 것들이다. 일본제 소해정은 일본군이 철수하고 남겨둔 것을 인수했다. 소해정이라는 특성상 나무로 만들어졌고 본래 소해임무를 수행하는 함정이지만 미군의 소극적 지원으로 이 함들로 경비임무를 수행했다. 함미에 육상에서 쓰던 37mm 대전차포와 기관총을 설치해 불법조업을 하는 일본어선이나 중국어선을 단속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의 상륙정과 발동선들이 병력들을 상륙시키자 옥계 방면을 경비하던 YMS 가평정 1척이 북괴군 선박들과 충돌, 1척 격침 및 1척 나포라는 전과를 얻었다. 하지만 소해정이라는 함정의 한계상 적에게 큰 피해를 주기는 힘들었다. LCI 보병상륙정은 약 200명의 무장병력이 탑승할 수 있지만 침략받는 입장에서 반격하거나 상륙전에 쓴 걸 제외하면 특별한 건 없다. 역시 전투함은 아니다. LST 전차 상륙함은 [[인천 상륙작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양동작전인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그 외에는 보병수송으로만 썼는데 그도 그럴만한 게 당시 국군에는 전차가 한대도 없었다. 그나마 나중에 M36 잭슨을 원조받고, 해병대에서 M4A3E8 셔먼을 1개 대대를 운용하고 나서야 전차 상륙용으로 쓸 수 있었다. YO-1 연료운반정은 만재배수량 약 1400톤으로 실을 수 있는 유류가 1000톤 가량이었다. 경비정으로 있던 1척은 PG-313 충무공함인데 일본군이 철수하고 조함창을 인수했을 때 건조가 중지된 배를 개수했던 것이다. 손원일 제독은 이 함을 인수해 부품을 구해 건조시켰고 비록 일부는 일본이 만들었지만 한국 해군이 최초로 건조한 함정이 된다. 287톤짜리 소형정이었으나, 한국 해군이 보유한 최초의 배인데다가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몽금포 작전을 비롯한 여러 작전을 수행하는 등 많이 활약해서 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초반에는 제대로된 무장이 없어 기관총 1정이 전부였지만 나중에 40mm 기관포를 장비했다. 그러나 위의 배들은 전투용이 아니기에 전쟁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해전에는 기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손원일 제독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게 플로팅 도크 2대, 순양함 2척, 구축함 8척, 잠수함 3척, 각종 소해함, 구잠용 함정 등을 요청했고 저것들을 다 준다면 2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 필요했다. 그러나 마셜 플랜으로 당장 유럽을 지원해야 했던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후순위였고, 이 정도의 원조는 불가능했다. 손원일 제독이 이끄는 해군은 전투함을 원조받을 수 없게되자 전투함을 구매하기 위해서 해군 장병들의 월급을 일부 보태고 고물상에다가 물건을 팔거나 해군부인회가 삯바느질을 통해 돈을 모았고 그렇게 모인 돈이 1만 5천달러. 장교 월급으로 쌀 한말도 못사던 시기인걸 고려하면 거액이었다. 이에 감격한 이승만 대통령이 4만 5천 달러를 보태주며 6만 달러로 모금액이 늘었고, 손원일 제독은 미국으로 떠나 450톤급 구잠함 4척을 구매했는데 이 중 하나가 그 유명한 [[백두산함]]이다. 원래 손원일 제독은 배수량이 더 크고 다양한 무장을 장비해 작전의 효율성이 좋은 [[타코마급 호위함]]을 사려고 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인해 대신 해양대 등 민간으로 넘어간 이 배들을 구매했다.[* 대신 타코마급 호위함은 휴전 이후에 받았다.] 손원일 제독은 우선 백두산함을 구매한 뒤 배에다 페인트를 다시 칠하고 수리까지 다시해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이 탄생된다. 나머지 지리산함, 금강산함, 삼각산함은 후에 구매해서 아직 한국에 들어오기 전이었으며, 개전 당시 전쟁에는 백두산함 한 척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북한군이 부산에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보낸 특수부대를 태운 선박을 대한해협에서 격침했고, 이는 훗날 [[대한해협 해전]]이라고 불리게 된다. 해군은 이 함의 성능에 만족했는지 나중에는 총 9척을 운용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여순반란으로 인해 해군 내에 독자적인 지상전 부대가 필요하다는 [[신현준(군인)|신현준]] 중령[* 당시에는 함정 장교.]의 건의에 의해 2개 대대로 발족했으며, 개전 직전까지 도서 지역에서 빨치산들을 소탕하는 대게릴라 작전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